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이문재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어릿광대처럼 자유롭지만 망명 정치범처럼 고독하게 토요일 밤처럼 자유롭지만 휴가 마지막 날처럼 고독하게 여럿이 있을 때 조금 고독하게 혼자 있을 때 정말 자유롭게 혼자 자유로워 죄스럽지 않고 여럿 속에서 고독해도 조금 자유롭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그리하여 자유에 지지 않게 고독하지만 조금 자유롭게 그리하여 고독에 지지 않게 나에 대하여 너에 대하여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그리하여 우리들에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 이문재 시집 중에서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마종기 경상도 하회 마을을 방문하러 강둑을 건너고 강진의 초당에서는 고운 물살 안주 삼아 한잔 한다는 친구의 편지에 몇 해 동안 입맛만 다시다가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향기 진한 이탈리아 들꽃을 눈에서 지우고 해뜨고 해지는 광활한 고원의 비밀도 지우고 돌침대에서 일어나 길떠나는 작은 성인의 발.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피붙이 같은 새들과 이승의 인연을 오래 나누고 성도 이름도 포기해버린 야산을 다독거린 후 신들린 듯 엇싸엇싸 몸의 모든 문을 열어버린다. 머리 위로는 여러 개의 하늘이 모여 손을 잡는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보이지 않는 나라의 숨,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말, 먼 곳 어렵게 헤치고 온 아늑..
감염의 경로 정끝별 이틀을 깜빡 넘긴 찐 고구마를 먹는다 약간 말랐을 뿐 암만 봐도 말짱하다 절반쯤을 먹는데 쉰 맛이 왈칵 찐고구마 몸을 샅샅히 살펴보니 작은 구멍들이 숭숭 구멍마다 맺힌 이슬이 쉰내의 근원이렸다 구멍이 품고 있었던 비명이 독하다 구멍들을 도려낸다 뿌리가 깊다 고구마를 찔 때 익었나 안익었나 푹푹 찔러봤던 구멍들이다 푹푹 찔렀던 구멍마다 상했다 찐고구마가 동강난다 의심이 제일 먼저 상하게 한다 내가 찌른 상처가 내 배를 아프게 한다 찔린 구멍마다 차오르던 복수가 내 뱃속에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