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s from portugal' 로 시작하는 그의 메일을 읽고 울컥하는 맘으로 여행 후기를 쓴다. 공항노숙을 해야하는 귀국 여정이 버겁고 부담스럽게 느껴졌었는데 지금 이순간은 내가 한국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버퍼링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덕분에 이런저런 여행의 여운도 충분히 느끼고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될 수 있어 감사하다. 모든 것이 감사한 순간이다. 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 모든 이들에게, 여정 속에서 나와 시간을 함께 시간을 보내주었던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무사히 여행을 마쳐가는 나 자신에게, 감사하다. 한때 난 여행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이 아주 바뀐 건 아니지만, 어쩌면 인생에 가끔 꼭 필요한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
아니 벌써 26일! 지금은 상하이 홍차우 공항이다. 이곳까지 어찌나 힘겹게 왔는지, 무사히 왔다는 사실이 스스로가 신기하고 대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 여기서 9시간만 밤을 지새우면 한국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탈 수 있다. 어서 한국에 가서 방을 청소하고 짐을 정리하고 떡볶이를 먹고 싶다.....ㅋ 오늘은, 아니 어제는 아홉시 즈음에 일어났다. 그 전날 야간열차를 타서 너무 피곤했었는데 다행히 푹 잤다. 그리고 아침엔 마지막으로 남은 햇반과 인스턴트 된장국을 만들어 먹었다. 별로 끌리지 않았지만 짐을 줄이자는 맘으로 먹었는데, 오랜만에 느끼는 쫄깃한 밥의 식감이 반가웠다. 후딱 한그릇을 헤치우고 마드리드의 이태원이라는 츄엔카에 갔다. 성소수자들이 많이 살기도 하고 bar나 식당이나 잡화점이 많은 곳이다..
20170518 어제 레리아에 왔다. 미가엘의 어머니에게 드릴 컴퓨터를 사고 친구네 집에 들러서 컴퓨터 세팅을 하고 11시가 다 되어서야 레리아에 도착했다. 미가엘의 어머니를 만났다. 바깔라우 요리를 맛깔나게 해서 우릴 기다리고 계셨다. 낯선 한국 여자애를 큰 포옹으로 따뜻하게 맞이해주시고 얇은 옷을 입은 나에게 잠옷과 털신을 빌려주셨다.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불어 이탈리아어 이렇게 5개 국어나 하신다는 어머니! 나의 어설픈 영어를 기다려주고 잘 설명해주시는 게 이 가족은 모두가 참 따뜻하구나 싶다. 미가엘이 우리의 관계를 뭐라고 설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쿨하게 한방을 내어주셔서 놀라고, 샤워를 하고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모습에 다시한번 놀랐다. 내가 왜 옷을 입고 나오지 않았느냐고 한국에선 상상도 못할..
20170523 흐르지 않을 것 같던, 흐르지 않았으면 싶던 리스본에서의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난 지금 마드리드로 가는 야간열차 안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또다시 생각나며 묘한 마음이 일었다. 미가엘과 찐한 포옹을 하고서 그가 기차에서 내리는데 눈물이 핑 돌더라. 어쩌다보니 내 여행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그. 영어를 잘 못하는 나에게 항상 두세번씩 설명해주고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내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걸 항상 이야기해주던 그. 감기에 헤롱대는 나를 각종 포르투갈 민간요법으로 돌보던 그.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내가 더 행복해질 수 있을지 나보다 더 많이 고민하고 여러가지를 제안해주던 그를, 난 이제 아마 큰 결심 없이는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 이 휑한 맘이 너무 시려서 차..
20170512 드디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다. 까미노를 시작한 이래 가장 정신없고 바쁜 하루였다. 오늘도 룸메이트들이 준비하는 소리를 들으며 깼다. 그리고 7시가 약간 넘어 출발했다.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지막 날이니 여운을 즐기자 생각하며 천천히 걸었다. 한시간 즈음 걸은 뒤에 또르띠야로 아침도 먹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지루한) 또르띠야. 그리고 한 세시간을 쉼없이, 대신 아주 천천히 걸었다. 중간중간 살짝 해도 나고 사람들도 많아 안심하고 이런저런 생각들도 차분히 정리하며 걸었다. 그러다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차오르더니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마침 근처에 바가 있어서 간식을 먹으며 큰 비를 피하고 다시 출발했다. 보슬비가 내렸지만 비가 멈출 것 같지는 않아서 그냥 출..
20170511 (팔라스데레이-사르세다) 어제 캡슐호텔처럼 생긴 알베르게에서 푹 잤다. 침대마다 커튼을 칠 수 있고 조명과 콘센트가 있는 아주 훌륭한 알베르게였다. 덕분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도 눈치보지 않고 밝은 곳에서 편하게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6시 30분에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7시 출발! 알베르게를 나서는데 비가 왔다. 다시 알베르게에 들어가서 우비를 입고 길을 나섰다.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는 68km 정도. 비오는 날 걷는 것은 처음이니까 일단 컨디션을 보고 얼마나 걸을지 결정하려고 했다. 만약 신발에 물이 새면 무조건 멈춘다는 원칙만 세우고서 걷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올수록 걸음이 빨라졌다. 어디든 빨리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생각해도 속도를 내어 걸었다. 어제부터 동행하고 ..
20170510 (포르토마린-팔라스데레이)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어제 오랜만에 걸어서 였을까. 일곱시가 좀 넘어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혼자 걷기 시작했는데 사람이 엄청 많았다. 단체로 국토순례를 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아 이래서 사리아부터는 순례의 느낌이 덜 든다고 했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의외로 오늘은 내 생각에 푹 빠져들 수 있었다. 그래서 혼자 걷는 길이지만 즐겁기도 하고 지루하지 않았다. (물론 중간 이후엔 동행을 했지만...) 뭐든 고민이 될 땐 솔직함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걱정이 되고 염려가 되는지 상대와 솔직하게 소통하기. 그러다보면 뭐라도 되겠거니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혼자 무언가를 결정하려고 하기 보다는 걱정과 고민을 정리하고 ..
20170508 (레온-사리아) 10시간이나 잤다. 오늘 오후에 산티아고까지 버스를 타고 갈 생각으로 8시까지 늦잠을 푹 잤다. 사람들이 거의 떠난 알베르게에 남아서 천천히 샤워도 하고 짐을 챙겼다. 그리고 이제 걸을 일이 없지라고 생각하며 무거운 판쵸 우비를 꺼내 버렸다. 그리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마침 알베르게가 까미노 위에 있어서 노란 화살표들이 많이 보였다. 몇몇 순례자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어찌나 밝은 미소로 인사를 해주는지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왠지 그립고 애틋하고 아쉬운 마음에 울컥울컥했다. 그래서 좀 더 고민해보고픈 마음에 일단 근처 바에 들어가서 샌드위치를 하나 시켜서 먹었다. 산티아고로 떠나는 버스는 4시. 그리고 만약 까미노를 더 걷고 싶다면 적어도 1시에는 루고로 가는 버스를..
20170507 (비냐까자르데시르가-레온) 사실상 까미노의 마지막날이었던 오늘. (여전히 고민이 된다. 내일 아침에 눈을 떠서 결정해야지!) 까리온까지 6키로 남짓을 아주 천천히 걸었다. 첫날 피레네를 넘던 날처럼 하늘에 구름한점 없이 아주 화창했다. 이틀전까지만 해도 까미노를 그만 걷는 것에 대해서 아쉬움이 전혀 없었는데, 어제부터 맘이 흔들린다. 사람들에게 그만 걸을 거라고 얘기하고, 또 그들의 놀라고 아쉬워하는 반응들을 보면서 더 고민하게 된다. 나보다 훨씬 아프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들은, 왜 걸을까 이 길을... 까리온에서 7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바에 앉아서 휴대폰을 충전하면서 톡투유를 봤다.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이다. 동양인 여자애가 혼자 바에 앉아서 영상을 보며 울고 웃는 모..
20170506 (이떼로데라베가-비냐까자르데시르가) 오늘은 계획보다 10km나 더 걸었다. 아마 혼자라면 5km 더 걸었을까? 잘 모르겠다. 지루해서 오늘 걸은 30km보다 훨씬 덜 걸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태어난 지 3개월만에 덴마크로 입양된 피터라는 친구랑 하루종일 같이 걷게 되었다. 나와 비슷하게 걸음이 느려서 걷는 데 많이 힘겹지 않았다. 한국에도 여러번 와봤고 한국에 관심이 많은 그에게 난 또 한국 뒷담화를 엄청 했다. ㅋㅋ 한국의 학교, 성소수자, 세월호 등등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한참 얘기를 나누다가 그가 꼭 북한 같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에게 한국에 관한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아 어렵다는 이야기도 보태주었다. 오늘도 구름이 많아서 걷기에 수월했다. 게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