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0 (오리손-론세스바예스) 무사히 나머지 피레네 구간을 넘었다. 어제 8km를 다섯시간동안 걸었던터라 걱정을 했는데, 함께 걸은 한국인 덕분에 너무 쳐지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 스틱 길이도 새롭게 조정하고 가방 메는 법도 배우고 덕분에 좀 더 가볍게 걸을 수 있었다. 같은 무게라도 어떻게 메느냐에 따라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다르다는 게 새삼 새롭게 느껴진다. 그렇게 한참을 같이 걷는데 슬슬 대화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와서 한국 전형의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굳이 논쟁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도중에 나는 잠깐 쉬어가겠다고 하고 먼저 보내드렸다. 피레네 꼭대기에선 춥더니 슬슬 더워져서 옷도 벗고 물도 마셨다. 그렇게 조금 쉬다가 출발해서 내려가는데 그를 다시 만났다. 그런데 그..
20170419 (생장-오리손) 산티아고길의 첫 코스는 피레네산맥을 넘는 것이다. 평소에 운동하고는 거리를 두고 살았던 나는 당연히 내가 하루만에 30km나 되는 피레네를 넘지 못할거라 장담했기 때문에 미리 피레네 중턱에 있는 오리손 산장에 예약을 했다. 그리고 지금 무사히 오리손 산장에 도착해 일기를 쓴다. 아침에 일어나 천천히 식사를 하고 산티아고로 캐리어를 부쳤다. 그리고 물과 초콜릿을 사서 걷기 시작했다. 가방은 7kg. 요령이 없어서인지 엄청 무겁게 느껴졌고 내가 무려 산티아고를 걷는다는 실감은 전혀 나지 않았다. 아홉시 반 쯤 출발했는데, 산티아고 순례에선 아주 늦은 출발 시간이라 그런지 걷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길을 물어볼 사람도 없어 조금 긴장하긴 했지만 이내 노란 화살표를 발견하고 안심..
20140423 (팜플로냐-사리키에기) 사람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깼더니 6시 50분이다. 어제 일찍 누웠는데도 그 시끄러운 와중에 깨지않고 잤다니, 엄청 피곤하긴 했나보다. 아님 내가 정말 예민하지 않거나. ㅋㅋ 씻고 짐을 싸고 있으니 어제 만났던 한국 분들이 잘 잤냐고 인사를 걸어오신다. 어제 밤에 내가 알베르게를 못 잡은 줄 알고 찾으러 돌아다니셨다고 하셨다. 그 말에 괜히 감사한 마음이... 아무튼 식사를 하고 그분들은 팜플로냐를 더 둘러본다 하셨고 나는 먼저 출발했다. 난 걸음이 느리니까... ㅋ 어제 마지막으로 노란 화살표를 보았던 곳으로 가서 걷기 시작했다. 한번 길을 헤매서 물어물어 다시 걸었다.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엄청 큰 고풍스러운 건물을 지나 화살표를 따라 걸은지 30분쯤 지났을까..
20170418 오늘의 긴 이동을 걱정한 탓일까. 지난 밤에 거의 30분마다 깨며 잠을 설쳤다. 잠도 안오는 김에 다섯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했다. 그리고 떼제-마콩-파리리옹-파리몽파르나스-바욘-생장! 이렇게 무려 다섯번을 갈아타서 무사히 생장에 도착했다. 어제밤에 잠을 제대로 못자서 엄청 피곤했는데도 이동하며 잘못할까 긴장을 했는지 잠을 또 한숨도 못잤다. 순례자 사무실에서 순례자여권을 받으니 저녁 8시. 순례자 사무실에서 만난 사람들과 같은 알베르게로 와서 쉬고 저녁도 함께 먹었다. 한 한국인 아저씨께서 돈 모아 시집가야지 이런데 혼자 오면 어떡하냐고 해서 그런 말 듣기 싫어서 왔다고 딱 잘라 답해드렸다. 그런 내 말도 대수롭지 않게 들으시는 것 같긴 했지만... 자려고 누워서 가만히 생각했다. 이렇게..
20170415 1. "네 마음에 불이 났다면 일단 그 불을 끄는 데 집중해봐. 누가 불을 냈는지 방화범을 잡으러 다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이미 집은 새까맣게 타버렸다는거지. 일단 네 마음의 불을 끄는 데 집중해라." -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p153, 조주은 몇해 전 마음에 불이 났던 어느날, 나에게 큰 위로가 되는 구절이었다. 그리고 지금, 작년에 크게 일었던 마음의 불이 어느정도 꺼졌으니 이제서야 방화범을 찾으러다니는 기분이다. 갑자기 생각나는 한 장면. 작년에 상담을 15회기 정도 받았었다. 어느날은 타인의 욕구나 반응에 민감한 나의 성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한참 얘기를 나누다 선생님께서 그런 말을 했었다. 폭력적인 상황에 자주 노출되었던 사람들 중 일부는 폭력적인 상황이 되풀이되는 것을..
20170414 (지금은 산티아고를 향한 까미노를 걷기 위해 생장으로 이동하는 중. 침묵피정을 하는 동안 썼던 일기를 정리해본다.) 1. 침묵피정을 하는 내내 날이 매우 맑았다. 덕분에 들판에 매트를 깔고 누워서 명상도 하다가 글도 읽다가 편지도 쓰다가 음악도 듣다가 낮잠도 자다가 글도 쓰면서 침묵을 만끽했다. 때로 같이 침묵하는 이들에게 당신은 왜 떼제에 오게 됐는지 침묵피정엔 어떤 마음으로 참여하는지 등을 묻고 싶기도 했지만, 침묵하며 서로 눈이 마주치면 미소로 응답하는 시간들이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떤 친구는 들판 한구석에서 요가를 하기도 하고 어떤 친구는 그림을 그리거나 종이를 접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너 그래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거 알아?" "나도 알아.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
20170413 1. 엄마가 떠났다. 사실 내심 어서 혼자가 되고픈 마음도 있었는데 막상 엄마가 탄 버스가 떠난 빈자리를 보니 맘 한켠이 휑-해지면서 정말 말 그대로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떼제는 부활절을 앞두고 매일 천명 가량 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들어오고 있는데 외로움이라니,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를 배웅하고 방에 들어오니 괜히 울컥했다. 그래서 사람이 난 자리가 더 크다고 하나보다. 나라는 사람은 이렇게 항상 크고 작은 감정에 질척이는구나 싶기도 했다. 그 감정에 더 빠져들고 싶지 않았는지 갑자기 잠이 밀려와서 낮잠을 잤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도 찝찝한 꿈들이 이어졌지만, 그래도 자고 일어나니 마음이 조금 개운해진 것 같았다. 내 몸과 마음의 신호에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낼 ..
어제 밤에는 부활을 축하하는 철야 예배가 있었는데 난 참석하지 않았다. 춥기도 하고 왜인지 맘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쉬고만 싶어서 졸리지도 않는데 계속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제 이틀 앞으로 다가온 산티아고를 준비하기 위해 체력을 비축한다는 그럴싸한 핑계를 스스로에게 대면서... ㅋ 떼제에 머물면서 난 신앙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확인하기도 했다. 성경의 이야기들이 나에게 큰 감응을 주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지만 떼제의 고요함은 나의 영혼을 충분히 쉬게 해주어 좋다.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도 않고 공동체 안에 머물며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침묵하며 산책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정말 말그대로 별일없는 일상을 보낸다. 누군가는 나에게 그런 시간이 아깝지 않냐고 하지만... 마치..
20170412 떼제에서의 세번째 날. 1. 아침예배를 기다린다. 수사님들이 한분한분 들어오시고 사람들은 침묵으로 기다린다. 예배당 앞쪽에는 다양한 크기, 모양을 한 네모진 조형물이 쌓여있고, 그 안에 하나씩 든 초가 반짝인다. 다양한 것들의 조화를 지향하는 떼제의 정신을 담았나. 한참을 네모 상자들을 보다가 이 공간에 수천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깜빡했다. 너무 고요해서... 이 많은 사람들이 침묵 속에 어떤 생각을 할까 잠깐 궁금해지기도 했다. 엄청난 우주가 이 예배당 안에 들어와있는 기분... 그러다 생각했다. 너무 혼자서 냅다 달렸구나. 내 곁의 사람들이 어떤 상태인지 마음인지 돌아보지 못하고. 곁의 사람들과 함께 숨 쉬고 한걸음씩 내딛는 노력이 부족했다.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의문이..
20170411 1. 지금 떼제엔 세계 각국에서 모인 대략 2000명 정도가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은 떼제에서의 첫날. 아직 모든 게 낯설고 또 피곤해서 제대로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언어의 한계도 많이 느꼈다. 영어를 잘 못하니 워크샵 내용 등도 잘 이해하지 못해서 힘겨웠다. 어릴 때 영어공부 하라고 하면 난 평생 한국을 떠나지 않을 거라며 도망쳐다녔었는데 이제와 후회를 한다. 다른 건 안해도 영어공부는 할 걸...ㅋㅋ 아무튼 오늘은 몸이 너무 피곤하기도 해서 오전 워크샵과 점심 예배는 빠지고 숙소에서 잤다. 그러고 나니 비로소 컨디션이 회복되는 기분이 들었다. 2. 떼제 이곳저곳을 산책하다 한 친구를 사귀게 됐는데 독일의 하임에서 일하는 친구였다. 한국에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고, 다큐멘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