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05 (요르니요스델까미노-이떼로데라베가) 점심부터 내일까지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그래서 새벽 일찍(그래봐야 6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여섯시반부터 걷기 시작했다. 하늘이 잔뜩 흐렸다. 비가 오기 전에 20km를 완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속도를 내어 걸었다. 어제처럼 길고 긴 평원이 이어졌다. 저 멀리 풍력발전기도 보이고 멀고도 긴 길에 띄엄띄엄 순례자들이 걷고 있다. 오늘은 걷다가 독일인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이름은 어려워서 잊어버렸지만. 독일에서 사진을 찍고 단편영화를 만드는 일을 한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함께 또 따로 걸으며 7시간 동안 30km를 완주하였다. 그의 좋은 카메라로 내 모습을 담아주기도 했다. 아마 말동무가 되어준 그가 없었더라면 30km가 무척 지..
20170504 (부르고스-오르니요스델까미노) 나흘동안 함께 했던 빌립보와 헤어지게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아마 9월에 이어서 걷는다고 한다) 나는 8시부터 걷기 시작해서 메세타 구간에 들어섰다. 정말 끝도 없이 이어지는 평원에 좀 지루하기도 하고 다시 혼자라는 사실에 마음이 싱숭생숭하기도 했다. 그와 연애을 했던 것도 아니고 고작 나흘을 함께 했을 뿐인데 허전함이 컸다. 아무래도 아프고 힘들었던 날들에 함께 해서 더욱 마음이 깊어졌나 싶기도 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순간에는 앞서 걸으며 바람을 막아주고 추울 때는 양말도 빌려주고 꼭 껴안아주던 그가 그저 스쳐지지나가는 인연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휑했다. 그와 세탁기를 함께 사용했었는데 더워서 꺼내 쓴 모자에서 그의 향기가 나서 반갑고 또 애틋..
20170429 (비아나-벤또사) 오늘은 무려 30km를 걸었다! 물론 배낭을 보내긴 했지만 평지라서 이렇게까지 걸을 수 있었다. 벤또사 전 마을에서 머물면 딱 좋았겠지만, 아침에 배낭을 미리 보내놓은터라 벤또사까지 꾸역꾸역 걸어왔다. 오늘은 평지가 계속 이어졌다. 로그로뇨라는 조금 큰 도시를 지나기도 하고 찻길옆을 걷는 시간도 길었고 끝없는 포도밭이 펼쳐졌다. 날씨가 조금 흐려서일까 길이 조금 지루하게 느껴졌다. 벤또사는 알베르게가 하나밖에 없는 매우 작은 마을이다. 그리고 난 벤또사에 배낭을 보내놓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꼭 와서 머물러야 했다. 혹시나 알베르게가 풀이 되면 난 무려 10km나 더 걸어가서 다음 마을에 머물러야 했다. 팜플로냐와 레이나에서도 알베르게가 풀이 되서 몇번이고 헤맸던 경험이 있..
20170428 (로스아르코스-비에나) 아침에 알베르게에서 식사를 하는데 오스피탈로가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다. 내 이름을 적어주었더니 잠시 있다가 철사를 구부려서 '걷는 사람과 KIM 그리고 꽃'을 연결해서 만들어주었다. 어찌나 예쁜지 예상치 못한 선물에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나도 누군가에게 손으로 만든 무언가를 선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손재주를 길러야지! 오늘은 걷다가 헝가리에서 온 폴과 체코에서 온 나탈리를 사귀게 되었다. 한참을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어디까지 갈 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무릎이 아파서 완주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각자의 속도로 걷기로 하고 헤어졌다. 난 아주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었는데 저 앞에 폴이 서..
20170427 (에스테야-로스아르코스)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하루다. 아침에 일어나 고민을 했다. 생리도 시작됐고 무릎도 아프고 ... 걷지 않고 쉬기, 중간까지만 걷기, 짐은 보내고 중간까지만 걷기. 이 세가지 중에 고민을 하다가 일단 알베르게를 나섰다. 그냥 쉬려면 한 4시간을 바에 있어야 하는데 그건 너무 지루할 것 같았다. 그래서 패스. 짐을 맡기러 갔는데 문이 잠겨 있어서 짐 보내기도 패스. 그래서 배낭을 매고 걷기 시작했다. 걷다보니 무릎을 절뚝거리며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한국인도 만나서 인사했다. 버스를 타러 간다고 해서 나도 살짝 고민을 했다가 다시 걸었다. 10km쯤 걸었다. 내가 원래 목표로 했던 지역에 도착했다. 그곳엔 알베르게가 2개 있었는데 둘다 1시에 연다는거다. ㅠㅠ 그때 시간..
20170426 (푸엔테데레이나-에스테야) 오늘은 몹시 춥고 몸이 늘어진다. 생리가 시작되려하나. 이상한 기운도 감돈다. 일기도 쓰기 싫을 정도로 몸이 축축 늘어지고 피곤하지만 그래도... 배낭을 부치고 에스테야까지 걸어왔다. 20km나 걸었는데 길이 완만해서 걸을만 했다. 근데 걷다가 지도를 보고 남은 거리를 확인하거나, 인터넷으로 무사히 완주한 사람들의 후기를 읽거나, 씩씩하고 힘차게 걷는 사람들을 보면 사실 좀 속상하다. 난 왜 무릎을 다쳐가지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이러고 있나. 매일같이 포기하는 생각을 하며 걷는 것도 속상하다. 꼭 끝까지 걸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시간내고 돈내서 여기까지와서 걷지 못하고 돌아간다는 게 속상하기도 하다. 그래도 어제 하루 쉬고 배낭도 보내서 좀 괜찮았다. 배낭 보..
20170425 푸앤테데레이나 아침에 깨어서 잠깐 고민을 했다가 걷지 않기로 결심했다. 오늘은 무릎을 위한 하루를 보내기로...! 느즈막히 샤워를 하고 짐을 싸고 근처 카페로 가서 오전 시간을 보냈다. 한 알베르게에서는 이틀 이상 머물 수가 없어서 다른 알베르게가 문을 열 때까지 책도 읽고 음악도 들으며 기다렸다. 전자책을 사서 절반 넘게 읽었다. 구구절절 공감이 되어 종종 콧등이 시큰거렸다. 그 중 몇가지 인상적인 구절들을 기록해본다. - 스스로에게 실수를 허용하지 않고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면 행동원칙과 자아상이 충돌할 경우가 많다. 그리고 높은 기준은 낮은 자존감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데 높은 기준은 타인에게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기곤 한다고 한다. 이에 관한 내용들을 읽으며 떠오르는 ..
20170424 (수리키에기-푸엔테데레이나) 여전히 무릎 꼭지가 시큰거린 채로 하루를 시작했다. 무릎을 보호하기 위해서 오늘은 짐을 나눠싸고 배낭을 짐배송 서비스로 부쳤다. 한치의 아쉬움도 없었고, 무사히 도착하기만을 바라는 마음 뿐이었다. 가방에는 물과 간식, 여권과 지갑만 넣고 길을 나섰다. 첫 코스는 페르돈봉을 넘는 것이었다. 어제 많이 올라와서 오르는 건 걱정이 없었는데 내려가는 것이 걱정이었다. 며칠간의 경험으로 하산이 무릎에 아주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무릎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찌릿거리며 아팠고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통증의 범위가 넓어졌다. 절뚝거리며 내려오니 만나는 사람마다 괜찮냐고 물었고 난 그때마다 울상을 지었다. 정말 눈물이 찔끔 날 지경이었다. 무릎..
20170422 (수비리-팜플로냐) 어제 밤엔 다행히 잠을 푹 잤다. 자주 깨지 않았다. 일곱시 즈음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처음엔 방향을 찾지 못해 헤맸다. 내일은 사람들이 나갈 때 잘 따라나서야겠다. 헤매던 중에 다행히 어제 만났던 아저씨를 만나서 노란 화살표를 찾았고 무사히 출발할 수 있었다. 오늘은 걸으면서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늦게 출발한 탓인 것 같았다. 마지막에는 산 속에서 사람이 거의 없어서 살짝 무섭기까지 했다. 몇해 전에 누군가가 노란 화살표를 자기집 방향으로 그려놓고는 여자 순례자를 성폭행했다는 사건이 계속 생각났다. 아무도 없으니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도 혼란스럽고 그 길이 엄청 길고도 멀게 느껴졌다. (아마 혼자 걷는 삶도 마찬가지겠지) 혼자라 이런저런..
20170421 (론세스바예스-수비리) 어제 알베르게에서 한국인을 대여섯은 만났다. 그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길을 나섰다. 다행히 내 또래의 여자친구가 있어서 즐겁게 수다를 나누다가 삼십분도 안되서 걸음이 느린 나는 혼자가 되었다. 사람들의 속도를 따라가느라 풍경을 음미하지 못하는 것보단 내 리듬을 따라가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걸으면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대안학교 교사를 하고 있는 친구도 만나고 핀란드에서 온 친구도 만났다.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하다가 또 혼자가 되기도 하는 이 길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어떤 순간엔 좀 숨이 차고 풍경을 놓치더라도 이야기가 더 즐겁고 있기도 하고, 또 그러다 헤어져서 혼자가 되어 이것저것을 마음에 담을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한국에서의 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