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Kiss from portugal' 로 시작하는 그의 메일을 읽고 울컥하는 맘으로 여행 후기를 쓴다. 공항노숙을 해야하는 귀국 여정이 버겁고 부담스럽게 느껴졌었는데 지금 이순간은 내가 한국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버퍼링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덕분에 이런저런 여행의 여운도 충분히 느끼고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될 수 있어 감사하다.

모든 것이 감사한 순간이다. 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준 모든 이들에게, 여정 속에서 나와 시간을 함께 시간을 보내주었던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무사히 여행을 마쳐가는 나 자신에게, 감사하다. 한때 난 여행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이 아주 바뀐 건 아니지만, 어쩌면 인생에 가끔 꼭 필요한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여행은 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홀로' 떠나는 '긴' 여행은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봤으면 싶기까지하다. 혼자이기에 몸도 마음도 무척 자유롭기도 하고, 새로운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기도 하다. 새로운 공간과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일상을 다양한 각도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 물론 영어를 더 잘 했더라면 훨씬 좋았겠지만!

돈이 무척 많이 들었다. 중간에 엄마까지 다녀갔고 무려 스위스를 가는 바람에 ㅋ 상상을 초월할 돈을 썼다. 계산하기도 두렵다.... ㅋㅋ 한때는 이 많은 돈을 쓸 만큼 가치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걸까 의문이 드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생각 만큼은 OK! 생애 한번쯤 해볼만한 경험이다 싶다. 엄마와의 여행도 좋았다. 난 비싸고 화려한 선물보다 행복한 기억이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낡거나 쓸모없어지는 선물 대신에 엄마가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때 기쁜 경험을 선물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날 돌이켜보면 온 몸과 마음에 기운이 딸렸다. 심지어 여행 준비를 하기도 버거울 정도로. 모든 것을 다 관두고만 싶었다. 쉬면서 다시 돌아올 지 생각해보라는 말에도 시종일관 그만두겠다고만 했다. 안팎으로 가시가 돋아서 나도 아프게 하고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도 아프게 하던 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사는 게 귀찮았다. 열심히 살던 나와 주변의 사람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차피 언젠가 죽을건데 뭐하러 열심히 사나, 허무했다. 열심을 다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저 그런 자위행위처럼 느껴졌다. 서서히, 그리고 어느 순간은 무척 갑작스럽게 그림자가 날 덥쳤다. 울기도 귀찮았다.

사실 여행을 떠나기 두려운 맘도 있었다. 타지에서 혼자 외롭게 힘들면 어떡하나 걱정됐다. 그래도 그 두려움을 뚫고 티켓을 사고 떠나서 참 다행이다. 그 덕에 지금의 내가 있다. 글쎄 무엇이 제일 좋았느냐고 나 자신에게 묻는다면, 모든 것이 나아졌다. 더이상 심장 박동도 느껴지지 않고 숨이 차지도 않는다. 어차피 태어났으니 다시 즐거웁게 살아보자는 생각이 든다. 조금만 눈을 돌리고 마음을 열면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결국 고립은 스스로 자초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졌다. 노트에 적었더니 무려 다섯 페이지나 된다. 인생에 답이 여러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 무얼하든 멀리 볼 수 있는 시선과 곁을 돌볼 수 있는 여유를 지킨다면 스스로의 삶에게나 세상에게나 충분히 기여할 수 있겠다 싶다. 스스로에게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을 때 타인에게도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나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어 준 여행지에서의 만남을 통해 인간에 대한 신뢰를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조건없는 호의를 베풀 수 있는 삶의 여유를 지니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은 일상으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면서 가능해졌다. 어쩌면 이것이 여행의 핵심이었나보다. '그것'이 아니면 안될 것 같은 일상에서 잠시나마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스스로와 상황을 돌이켜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난 내 실천이 행동이 삶이 어디로 어떤 물결을 타고 흘러가는지 정리를 하지 못하면 패닉이 오는 것 같았다. 여행은 거리두기도 가능하게 했고, 생각을 하거나 글을 쓸 수 있는 여유도 허락했다. 애초에 목표했던 100편에는 훨씬 못미치지만 그래도 글을 쓰려했던 노력들 또한 나의 지난 3개월을 더욱 의미있게 만들어주었음을 안다. 그러니 글을 쓰자. 글은 일상 속에서 떠날 수 있는 짧은 소풍 같다. 어쨌건 스스로를 좀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게 도와주니. 글쓰기 모임에 다시 나가고 싶다.

내가 아는 것, 가진 것이 고갈되었는데 계속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버거웠다. 나를 채울 수 있는 무언가들을 하고 싶다. 여성주의상담도 배우고 싶고 들이나 비폭력평화물결의 교육이나 각종 세미나들도 쫓아다니고 싶다. 부지런히 책도 읽고 정리도 잘 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몸으로 할 줄 아는 것도 늘리고 싶다. 춤이건 운동이건 악기건 자수건 요리건. 그런 의미에서 내일모레부터 스윙을 배운다! 일상을 잘 가꾸고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내가 청소년운동을 계속 하고 싶다는 걸 안다. 글쎄 다른 걸 안해봐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인생 뭐 별거 있나. 기왕 시작한 거 즐겁게 이어가고 싶다. 다만 꼭 어느 조직 어느 활동 만이 정답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복지와 운동의 경계에서 나침반처럼 계속 흔들리더라도 잘 버티며 즐겁게 이어갈 수 있는 마음의 힘을 키우고 싶다. 그리고 그 힘은 절대 혼자서 기를 수 없고 함께하는 사람들과 서로의 힘을 함께 북돋아가야한다는 것도 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한다. 내게 좋은 동료가 필요했듯이, 나의 동료에게도 좋은 동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길어올린다. 나는 내 동료들에게 어떤 동료였는가. 역시 반성하게 된다. 이미 헤어진 동료에게나 남은 동료에게나. 내가 내 동료들에게 바라던 것들을 내가 먼저 베풀 수 있는 여유를 지니고 싶다. 말걸기, 다가가기, 언제나 상태를 살피기.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 비판을 하더라도 많이 미워하진 말기로. 그래야 타인의 비판이나 다른 목소리에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 같다.

어쨌건 이 많은 것들을 잘 해내지 못하더라도 하고픈 것들이 생기고, 에너지가 생겼다는 사실, 뭐든 부딪혀보오 싶다는 용기가 생겼다는 것은 이 여행이 내게 준 돈 주고도 얻지 못할 커다란 선물이다. 좋은 기운을 품고 싶다. 여행에서 얻은 것들을 이제 사람들과 나눌 차례다.

'뭐라도 되겠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056 귀국 여정  (0) 2017.05.27
055 레이리아  (0) 2017.05.27
054 마드리드행 야간열차  (0) 2017.05.25
053 비오는 산티아고  (0) 2017.05.14
052 하드코어 순례길  (0) 2017.05.13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