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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3

흐르지 않을 것 같던, 흐르지 않았으면 싶던 리스본에서의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난 지금 마드리드로 가는 야간열차 안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또다시 생각나며 묘한 마음이 일었다. 미가엘과 찐한 포옹을 하고서 그가 기차에서 내리는데 눈물이 핑 돌더라. 어쩌다보니 내 여행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그. 영어를 잘 못하는 나에게 항상 두세번씩 설명해주고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내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걸 항상 이야기해주던 그. 감기에 헤롱대는 나를 각종 포르투갈 민간요법으로 돌보던 그.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내가 더 행복해질 수 있을지 나보다 더 많이 고민하고 여러가지를 제안해주던 그를, 난 이제 아마 큰 결심 없이는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 이 휑한 맘이 너무 시려서 차라리 만나지 않았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 덕분에 내 여행이 가득 채워진 느낌이 든다.

그는 '내가 영어를 좀 더 잘했더라면 더 깊은 소통이 가능했을텐데' 라는 내 말에 언어는 소통을 위한 일부 수단일 뿐이라고, 우리가 언어가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나눌 수 있는 다른 것들도 많이 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매 끼니를 정성스런 요리와 맛있는 레스토랑에서 챙겨주고 내가 가끔 다운이 될 때도 기어이 날 웃기고야 말았다.

글쎄 그와 고작 열흘 정도를 함께했지만 이번 여행에서, 아니 내 삶에서 특별한 존재가 된 듯 하다. 그의 엄마네 집까지 나를 데려가 준 것 또한 정말 감사한 일 중 하나. 그의 엄마네 집에서 나흘을 머물렀다. 덕분에 여행자 신분으로 가기 어려운 레이리아라는 동네도 가보고 포르투갈 현지인들이 즐기는 식사도 함께할 수 있었다. 특히 그의 엄마와 포르투갈의 혁명과 페미니즘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던 순간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미가엘을 임신했을 당시 도박중독자였던 남편과 헤어지고 혼자서 미가엘을 키우면서 혁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하셨다. 지금까지도 공산당의 당원이신 어머니. 한국의 여성들의 삶을 이야기해주었더니 포르투갈의 60년 전 같다고 하셨다. ㅋㅋ 자라면서 엄마, 이모, 할머니 이렇게 여성들의 돌봄만 받아서인지 미가엘은 전혀 마초같지가 않았다.

사실 포르투갈에서 한 일주일은 몸살감기로 앓았다. 느즈막히 일어나 열두시쯤 아침을 먹고 쉬다가 두시쯤 점심을 먹고 동네 산책을 하다가 낮잠을 자고 장을 봐서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는, 아주 단순한 일상을 보냈다. 그가 볼일이 있으면 병원이며 미팅이든 따라다니며 리스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래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던 감기기운에 몸이 늘어졌지만, 그래도 외국에서 아플 때 혼자가 아니라 정말 다행이었다. 것도 날 아껴주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외롭기보단 오히려 감사함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엄마가 폴른(화분)을 먹고싶어 한다는 말에 내가 신트라에 다녀오는 사이에 하루종일 폴른을 파는 곳을 찾아 돌아다니기까지 했다. 날 위해 좋은 올리브오일이며 꿀이며 찾아다주었다. 어쩌면 이제 평생 만나지 못할 사이인데다가 나는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데 아무런 조건없이 나에게 베풀어주는 그가 신기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너무나 고마웠다. 어떤 순간에는 얘가 왜 이러나 의심스러워서 왜 날 그리워했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와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한꺼번에 기억하고 기록하려니 힘들다....ㅋㅋ)
섹슈얼리티에 관한 이야기, 쉐어하는 삶에 관한 이야기, 나의 일과 계획에 관한 이야기, 그의 새로운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 서로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 등등. 우린 많이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지만 많은 부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신기하고 반가웠다.

그리고 그가 3월의 나는 긴장한 듯 느껴졌는데 지금은 얼굴도 전체적인 느낌도 훨씬 편하고 자유로워 보인다고 했다. 그 말이 얼마나 고맙던지...

글쎄, 혼자 여행한 덕일까. 상상도 못했던 이 영화같은 인연에 대한 내 느낌을 어떻게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짧고도 찐한 연애를 한 것만 같다. 그의 삶에 열흘동안 여행을 다녀온 기분. 리스본이 아니라 미가엘에게 다녀온 것 같다. 중간에 기차표를 잃어버려서 하루 더 리스본에 머물러야했을 뻔 하기도 했었는데, 돈은 좀 아깝지만 하루 더 그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좋기도 했다.

아무튼 나의 여행은 이렇게 끝나간다. 마드리드에서 하룻밤을 자고 세번의 환승을 거치면 한국에 도착한다. 어서 가고픈 마음과 이곳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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