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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되겠지

055 레이리아

hyeminist 2017. 5. 27. 05:06

20170518


어제 레리아에 왔다. 미가엘의 어머니에게 드릴 컴퓨터를 사고 친구네 집에 들러서 컴퓨터 세팅을 하고 11시가 다 되어서야 레리아에 도착했다. 미가엘의 어머니를 만났다. 바깔라우 요리를 맛깔나게 해서 우릴 기다리고 계셨다. 낯선 한국 여자애를 큰 포옹으로 따뜻하게 맞이해주시고 얇은 옷을 입은 나에게 잠옷과 털신을 빌려주셨다.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불어 이탈리아어 이렇게 5개 국어나 하신다는 어머니! 나의 어설픈 영어를 기다려주고 잘 설명해주시는 게 이 가족은 모두가 참 따뜻하구나 싶다.

미가엘이 우리의 관계를 뭐라고 설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쿨하게 한방을 내어주셔서 놀라고, 샤워를 하고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모습에 다시한번 놀랐다. 내가 왜 옷을 입고 나오지 않았느냐고 한국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했더니 오히려 내 말에 놀란다. 가족이고 친구인데 무슨 상관이냐며....덜덜.. 이 자유로움 속에서 사람들이 자기 몸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조건 가리고 아름답게 가꿔야 할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기.

푹 자고 다음날은 느즈막히 일어나 빵과 차로 아침을 하고 미가엘의 어머니가 항상 점심을 드시러 가신다는 식당에 가서 함께 식사를 했다. 포르투갈은 어딜가나 음식이 맛있다. 포르투갈에서 음식이 입에 안맞았던 적은 한번도 없다. 심지어 음료나 디저트도 넘나 맛있다. 게다가 한국보다 저렴하기까지 하다.

어른들을 대하는 미가엘의 태도가 천성이 친절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한다. 카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 햇볕이 얼굴에 내리쬐니 일어나 어머니 옆에 가서 손을 쭉 펴서 그늘을 만들어주는가 하면 함께 허리가 불편하신 어머니를 마사지 해드리자며 나에게 포르투갈 마사지 비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누노라고 미가엘의 친구가 있는데, 깊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그는 미가엘에게 시도때도 없이 전화하며 죽겠다느니 어머니를 죽이겠다느니 물건을 던지겠다느니 등등 힘든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가끔 누노와의 전화를 끊고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며 힘들어 할 때도 있지만 한번도 그의 전화를 피하는 건 못봤다. 항상 정성스레 그의 전화를 받았다. 그 힘듦을 모르는바가 아니라 그가 더 대단하고 좋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관계에 최선을 다하는...


한가로운 이 나라와 이 가족의 분위기에 나도 덩달아 늘어진다. 그의 일상을 따라다니는 게 때로는 (더워서) 힘들고 의미를 못 찾을 것 같을 때도 있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고 여행을 하며 현지인의 삶에 푹 빠져볼 흔치 않은 기회인 걸. 단지 이곳이 유럽이라는 사실이 나의 마음을 조금 부담스럽게 하는 것 같다. 오기 힘든 곳이니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하지만 이곳이 유럽이기도 하지만 나의 휴가이기도 하다. 난 좀 멍때리는 시간이 필요하고, 지금 미가엘 덕분에 돈 걱정없이 그리고 길을 잃을 걱정 없이 잘 쉬고 있지 않나.

오늘은 그와 점심을 먹고 레리아성에도 다녀오고 전시회도 다녀오고 파두 공연도 봤다. 미가엘 어머니네의 거실은 너무나 포근하다.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오밀조밀한 장식이 가득한 포르투갈 시골의 리빙룸. 언젠가 엄청 그리워하게 될 것 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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