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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되겠지

050 갈팡질팡

hyeminist 2017. 5. 9. 03:58

20170508 (레온-사리아)

10시간이나 잤다. 오늘 오후에 산티아고까지 버스를 타고 갈 생각으로 8시까지 늦잠을 푹 잤다. 사람들이 거의 떠난 알베르게에 남아서 천천히 샤워도 하고 짐을 챙겼다. 그리고 이제 걸을 일이 없지라고 생각하며 무거운 판쵸 우비를 꺼내 버렸다. 그리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마침 알베르게가 까미노 위에 있어서 노란 화살표들이 많이 보였다. 몇몇 순례자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어찌나 밝은 미소로 인사를 해주는지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왠지 그립고 애틋하고 아쉬운 마음에 울컥울컥했다. 그래서 좀 더 고민해보고픈 마음에 일단 근처 바에 들어가서 샌드위치를 하나 시켜서 먹었다.

산티아고로 떠나는 버스는 4시. 그리고 만약 까미노를 더 걷고 싶다면 적어도 1시에는 루고로 가는 버스를 타야했다. 까미노를 걸으면 이탈리아에 갈 수 없다. 까미노냐 이탈리아냐. 그 두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가 일단 버린 우비를 다시 가지러 호스텔로 급히 돌아갔다. 만약 까미노를 걷는다면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우비가 있어야 했다. 호스텔에 가서 우비를 다시 챙기고도 넘나 고민이 되었다. 그래서 친구 찬스! 혼자 결정하기 어려울 땐 역시 누군가와 함께 고민을 나누는 게 최고다. 얘길 나누다가 다시 까미노를 걷기로 맘을 정했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야 리스본에 가도 충분히 가질 수 있지만, 함께 걸으며 눈물과 웃음을 나눌 수 있는 동반자는 순례길에서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이탈리아를 가면 멋진 유적들도 많이 볼 수 있고 또 빌립보도 다시 만날 수 있겠지만, 그건 다음에 계획해서 떠나도 충분히 가능할 여행이었다. 물론 까미노도 언제든 다시 오려면 올 수 있겠지만 한번 시작한 길을 어설프게 중단하는 게 영 아쉬웠다. 암튼 그래서 다시, 계속 걷기로 결정! 물론 중간에 버스를 타게 되겠지만 말이다.

벌써 몇번째 여행 루트의 변경인가. ㅋㅋ 이 우왕좌왕 갈팡질팡이 너무 낯설지가 않았다. 아마 여행 기간이 길고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그래, 라고 합리화를 해보려 해도 아니 너무 자주 맘이 펄럭거린다 싶다. 혼자하는 여행이니 이런 우왕좌왕도 더 자유롭게 충분히 느껴볼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그만큼 내가 갈 수 있는 곳, 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 행복한 고민이라는 것으로 결론을!

그렇게 마음을 결정하고 레온 버스터미널로 와서 티켓을 교환했다. 사리아까지 가서 한 일주일정도 더 걷게될 것이다. 사리아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물을 마시는데, 세상에 새삼 내 손이 안 떨린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러고보니 심장박동도 안느껴진다. 말도 안통하는 외국에서 무려 3번이나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날인데도, 음 죽기야 하겠나 싶다. 이런 마음의 여유가 얼마만인가. 별것도 아닌 것에 마음 졸이고 심장이 벌렁거리던 날들이 멀게만 느껴졌다. 아마 쉬지 않고 계속 일하며 약을 먹거나 상담을 받거나 했으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좋아지긴 어려웠을테다. 내가 (무조건) 편히 쉴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준 모든 사람들에게 정말 고맙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빚지고 산다.

아무튼 오늘은 레온-폰페라다-루고-사리아 이렇게 3번이나 버스를 갈아탔다. 중간중간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을 포함해서 총 6시간의 긴 이동. 그래도 내일부터 다시 걷는다는 생각에 괜히 설렌다. 포기하고 그냥 갔으면 어쩔뻔 했나? 사리아에도 무사히 도착했고, 100명나 묵을 수 있는 큰 알베르게에 단 둘이 묵게 되었다. 늦게 도착해서 자리가 없을까봐 큰 알베로 왔는데 단 둘이라니. 아무튼 내일부터 다시(!) 걷는다. 이제 정말 산티아고가 얼마 남지 않았다.

삶의 어떤 순간에나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나 아쉬움은 있을 수밖에 없을테다. 하지만 그 아쉬움을 길게 붙잡고 있는 것보다는 이미 선택한 것에 집중하고 깊게 빠져드는 것이 현명한 것! 물론 머리론 알아도 잘 안될 때가 많지만ㅋ 아무튼 나의 계획은 까미노를 마저 걷고 남은 기간 리스본에서 쉬다가 귀국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책 제목이 생각난다.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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