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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되겠지

048 새로운 세상

hyeminist 2017. 5. 6. 23:26

20170506 (이떼로데라베가-비냐까자르데시르가)

오늘은 계획보다 10km나 더 걸었다. 아마 혼자라면 5km 더 걸었을까? 잘 모르겠다. 지루해서 오늘 걸은 30km보다 훨씬 덜 걸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태어난 지 3개월만에 덴마크로 입양된 피터라는 친구랑 하루종일 같이 걷게 되었다. 나와 비슷하게 걸음이 느려서 걷는 데 많이 힘겹지 않았다. 한국에도 여러번 와봤고 한국에 관심이 많은 그에게 난 또 한국 뒷담화를 엄청 했다. ㅋㅋ 한국의 학교, 성소수자, 세월호 등등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한참 얘기를 나누다가 그가 꼭 북한 같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에게 한국에 관한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아 어렵다는 이야기도 보태주었다.

오늘도 구름이 많아서 걷기에 수월했다. 게다가 언덕도 하나도 없어서 무릎도 하나도 안 아팠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빨래와 샤워를 하고 남은 일정을 계산해봤다. 매일 30km씩 꼬박 걸으면 산티아고를 완주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은 사실 완주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건너뛰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 지 모르겠지만, 뭐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는 남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저 그 순간 마음이 이끌리는대로 최선의 선택을 할 뿐.

영어를 얼마나 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외국인과 얼마나 소통할 수 있는지가 정해진다. (대부분 영어로 소통하기 때문에...) 하지만 얼마나 의지를 갖고 있느냐가 소통에 있어서 더 큰 의미를 가질 때도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까미노를 걷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있는데, 왜인지 그들과는 오랜 시간 함께 걷거나 이야기를 하게 되지는 않는다. 가끔 한국말을 하고 싶기도 하지만, 오히려 서툴지만 외국인들과 대화가 더 잘 통하는 이 느낌은 뭘지. 내가 하는 한국 뒷담화에 맞장구를 잘 쳐줘서 그런걸까? ㅋㅋ

특히 유럽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한국에서는 정말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들을 아무렇지 않게 박탈 당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피터에게서 그의 친구가 두명의 엄마를 가진, 그러니까 레즈비언 엄마를 두었지만 학교에서나 어디서나 아무 문제나 차별적인 시선 없이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에서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된다. 덴마크는 물론 세금을 많이 내지만, 원한다면 대학교육도 무료이고 독립할 때 돈이 없으면 국가에서 집도 준다고 한다. 와우, 내가 엄청난 감탄사를 토해낼 때마다 그는 텍스를 많이 낸다고 강조했지만, 그래도 훨씬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부러웠다. 적어도 돈이 없다고 기본권을 박탈당하지는 않을 수 있는 사회이니 말이다.

까미노를 걸으며, 다양한 사회 제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과 소통하며,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확신을 점점 가지게 된다. 한국에 관한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30년 전의 덴마크 같다는 피터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쨌건 열심히 부딪히고 싸우다보면 우리 사회도 점점 나아지겠거니 싶다. 적어도 내가 죽기 전에 한국에서 동성간의 결혼이 가능해진다면 정말 좋겠다. 그리고 어린 한국 사람들에게 '세상에나 옛날엔 동성끼리는 결혼도 못하는 사회였단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물론 유럽 사람이라고 해도, 까미노를 한달동안이나 걸을 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는 건 그들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드러낸다고도 생각한다. 나를 포함하여 뭐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어쨌건 아주 어렵게만 살아가는 사람은 아닐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을 생각하면 언제나 죄책감이 동시에 떠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걸으며 다양한 이들에게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새로운 사회를 꿈꿀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건 즐거운 일이다. 내가 한국 뒷담화를 그렇게나 하고 다녀도, 난 한국을 떠나 살 생각은 없고 한국이 보다 살만한 나라가 되는데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픈 맘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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