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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일기

hyeminist 2022. 6. 7. 00:10

일본에 온 지 백일 정도가 흘렀다. 정신없이 일본에 올 준비를 할 때만 해도, 아니 일본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만 해도 매주 한번씩이라도 블로그에 일기를 써야지 생각했었는데 왠지 잘 시작이 안됐다. 글을 잘 쓰고 싶은데 내 글은 한참 모자라다는 생각도 있었고,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삶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사실 별 볼 일 없어보이는 내 일상이 부끄럽기도 했다. 세상사에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오로지 내 안위만 채우고 있는 내 일상이 기록으로 남길만한 가치가 있나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 귀찮음이 크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떻든지간에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헤드폰을 끼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요즈음처럼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적이 있었나 싶은 정도로 안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침에 알람에 쫓기지 않고 일어나서 커피를 내리고, 테라스에 나가서 식물들의 상태를 살핀다. 동향이기는 하지만 해가 잘 들고 통풍이 잘 되어서인지 하루가 다르게 싹을 틔우고 잎과 꽃을 피워내는 식물들을 보며 남아있던 잠기운을 날린다. 그리고는 거실 쇼파에 누워서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하면서 커피를 마신다. 샤워를 하고 열시부터는 세시간 동안 재택으로 일을 한다. 일이 마칠 무렵이면 짝궁이 밥을 차려서 날 부른다. 드라마를 보면서 밥을 먹고 오후에는 한국어 교육 과정 수업을 듣거나 집안일을 하거나 한다. 열두시가 지나면 테라스에도 그늘이 져서 요즘 같은 계절엔 테라스 의자에 앉아 선선한 공기를 느끼기에 딱이다. 테라스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필사를 하거나 일본어 공부를 한다.  목요일에는 한국어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전날에는 수업 준비를 하거나 짝궁을 앉혀놓고 수업 연습을 한다. 일하는 시간이 짧아서 돈은 얼마 안되지만 실습하는 기분으로 다니는 중이다. 어느 날은 수영이나 클라이밍을 하러 가기도 하고 두어시간 짝궁과 수다를 떨며 산책도 한다. 인스턴트 음식을 싫어하고 요리를 좋아하는 짝궁 덕분에 매끼니 건강한 음식을 챙겨 먹는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각자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잠들기 한시간 전쯤부터는 침대에 같이 앉아서 나는 뜨개질을 하거나 책을 읽고 짝궁은 유튜브를 본다. 그리고 오늘도 고마웠다, 사랑한다 인사를 하고 잠에 든다. 

 

눈물의 캐릭터였던 내 눈물이 마른지는 몇 년이 되긴 했지만, 일본에 오고 나서는 나의 문제나 주변의 문제나, 심지어 뉴스나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세상 어딘가에서 진짜로 일어나고 있는 일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드라마를 보면서만 눈물을 흘리고 있다. 보고 듣는 것들이 줄어들어서일까, 그만큼 죄책감도 부채감도 많이 줄어들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삶은 가벼워졌고 내 일상에는 상상치도 못했던 여유들이 가득해졌다. 선 자리가 달라지니 풍경이 달라졌다. 숨쉬기만 해도 돈이 드는 세상에서 돈 걱정도 약간 덜었고 매일밤 함께 잠드는 사람도 생겼다. 이러한 내 일상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내가 이 일상의 안정감을 너무나 편하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5년 전 이맘때 나는 병원에 갈 돈이 없어서 우울증 약 복용을 갑자기 끊었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신림동 언덕배기 남향집 내 침대로 쏟아지던 한여름의 햇빛. 에어컨도 없었던 내방의 온도는 42도를 찍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약 중단으로 엄청난 무기력증에 시달리던 나는 침대위에서 꼼짝 못하고 눈물만 흘렸었다. 돈은 없는데 누구에게 손 벌릴 용기도 없었던 나는 책꽃이에 있는 책들을 알라딘 헌책으로 팔고 쓰지 않는 물건들을 당근마켓으로 팔고 잊고 있었던 보험금을 청구하면서 푼돈을 만들어 '연명했다'. 

 

그 이후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어쨌든 나는 다시 약을 먹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요즘은 정말 스스로 상태가 좋아졌다는 판단도 들고 의사선생님과 상의도 해서 약들을 반으로 잘라서 먹고 있다. 다음달에는 반의 반으로 잘라서 먹을거다. 약을 줄이는 부작용으로 두통과 어지럼증에 고생하는 날들도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가라앉거나 부정적으로 생각되는 날들이 거의 없이 안정적으로 약을 줄여가고 있다. 

 

약을 꾸준히 먹었던 덕인지, 탓인지, 나를 둘러싼 환경이 많이 달라진 덕인지, 탓인지, 불안감과 부정적인 생각들이 정말 많이 줄었다. 일본에 오기 전만 해도, 짝궁과의 관계로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을지 하루에도 수십번 고민하고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너무 컸다. 근데 요즘은 오히려 다양하고 새로운 것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이고 이로 인해 내 삶이 조금 더 넓어질 수도 있겠다는 (나와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해왔던) '긍정적'인 느낌들이 가득하다. 이런 나의 일상이 고맙고 좋으면서도 너무나도 부끄럽지만, 부끄러우면 부끄러운대로 기록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완벽한' 존재란 존재하기 어렵고, 보다 균형있는 삶을 위해서 나의 욕망과 한계를 알아가는 시간으로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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