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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을 요구 받지만 기대되지는 않는 사람들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거야.”, “보호자 어딨어?”, “밀가루 음식 먹지 마.”
척수장애인강사양성과정에서 만난 교육 참여자들이 “나는 이 말만 좀 안 들어도 스트레스가 줄 것 같다”는 질문에 적어준 답이었다. A는 자신도 밀가루 음식 잘못 먹으면 배에 탈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살면서 때론 ‘불량식품’이 먹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 인간인데, 엄마는 마냥 먹지 말라고만 해서 밤에 몰래 떡볶이를 먹었다고 했다. B는 은행에 통장을 만들려고 갔는데 필요한 서류를 다 챙겼음에도 직원이 보호자는 어딨냐고 묻는 게 화가 났고, 흥분한 그의 말을 은행직원은 더 알아듣지 못했다고 했다.
복지 혜택에 기대지 말고 자립하라는 요구를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안돼 / 하지 말아 /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것”이라는 이중의 메시지 속에 갇혀있는 이들, 자신을 ‘보호’하는 자의 의사에 자기 삶이 종속되기 쉬운 위치에 놓이는 존재들에는 또 누가 더 있을까. 참여자들이 길어준 경험들을 엮으며 이 사회의 차별이 작동하는 방식을 나눈다. 어린/여성화된 위치를 강요받으며 보호의 대상으로만 갇히거나 전형화된 모습에서 벗어났을 땐 곧바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더 연대할 필요를 함께 찾는다.


​문제는 ‘누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권과 장애인인권, 이 두 단어가 어떻게 다르게 들리는지 물었을 때 한 참여자가 다음과 같은 답을 했다다. “장애인인권은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장애인권이라고 했을 때는 장애를 만드는 사회와 시스템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 같다.” 손상과 장애를 구분하는 핵심 문제의식을 짚어준 답변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이날 교육 참여자들은 당사자 강사로 활동하고자 배우려고 모인 이들이었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제도와 조건 속에서도 이 자리에 모인 참여자들의 모습이 단지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란 의미를 감히 붙여 드리고 싶었다. 처음엔 학력 때문에 자기를 고용할 수 없다는 말에 오기가 생겨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 졸업장까지 취득해서 다시 입사 지원을 했더니 이제야 “그 몸으로 일할 수 있겠냐”며 비아냥대던 인사 담당자가 너무 싫었다는 얘기를 참여자 한 분이 나눠주셨다. 지금이야 장애인차별금지법으로 어떻게든 그 회사를 족쳤겠지만 그 때는 법도 없었다고, 하지만 그 자리에서 “따박따박” 지금 상대의 그 말이 얼마나 장애인을 모욕하는 것인지 되받아치고 돌아 나왔다는 이야기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마음에 울림을 남겼다.


​태초에 무기력한 개인은 없다

“사람을 길들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가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없앤 뒤에 그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그의 머릿속에 새겨 넣는 것이다. 더 많이 길들여질수록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힘은 그만큼 더 줄어든다.” 생존에 대한 공포를 무기 삼아 사람들을 예속하게 만드는 것은 세련된 고문이라고, 그렇기에 기본소득이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기본소득, 자유와 정의가 만나다>의 저자들은 말한다. 저자의 말처럼 자유가 관계적 개념이라면 함께 자유롭기 위한 조건, 즉 관계적 존엄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장치들에 대한 고민의 필요성이 등장한다.
교육에서 한 참여자가 “뭐 먹고 싶니? 재미있게 놀고 있니?”란 말을 듣는 게 스트레스가 된다고 했던 것도, 척수장애를 가진 자신이 먹을 수 있는 것이나 놀 수 있는 방식이 사회적으로 제한되어 있기에 종일 집에 홀로 남아 핸드폰 게임밖에 할 수 있는게 없는데 자신의 의사를 물어주는 엄마의 그 말이 때론 자기 처지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아 더 듣기 싫다는 것이었다.
태초에 무기력한 개인은 없다. 개인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할 수 있는 게 핸드폰 게임 밖에 없는 것은 단지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활동보조 서비스가 없는 상황에서 내가 뭔가 하고싶다는 욕구를 말할수록 애꿎은 엄마만 더 피곤해진다는 깨달음과 배려에서 비롯된 결과이기도 하다. 게임 밖에 안 하는 모습을 두고 자립의 의지가 없는 무기력한 존재라 비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상황에서 진짜로 힘든 이는 무기력해진 자신을 수용하기 위해 자기분열하는 당사자일지 모른다. 직면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못난 모습을 받아들이려 애쓰는 과정에 “네 탓이 아니야”라고 말해줄 관계를 만나는 것, 수치심과 자괴감에 압도되지 않고 세상에 분노하며 자기 경험의 서사를 다시 쓰는 과정을 돕는 존재가 때론 인권교육일 수 있으면 좋겠다.

*작성: 날맹(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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