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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을 꾸준히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몇 년째 일기장에 끄적거리고 있기는 하지만, 완성된 글을 쓰는 습관을 기르기 위해서는 역시나 오픈된 곳에 글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가(?)백수가 된 지 일주일. 이제야 비로소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활동을 하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엄청 자주 했었다. 활동을 하며 생기는 풀리지 않는 고민들을 글로 정리하면서 내 언어를 차곡차곡 만들어가고 싶었지만, 항상 하루 일과를 허덕이며 쫓아다니기 바쁘고 집에 돌아오면 진이 빠져 손도 까딱할 수 없는 컨디션이 되곤 했다. 끼니도 거르는 일이 부지기수였던 일상에서 글쓰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2. 어쩌다 긴 휴가를 갑자기 얻게 되었다. 몸과 마음의 기력이 떨어져 일상을 꾸려가기 힘든 상태가 되어,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두 손 두발을 들었다. 이게 휴가가 될지, 아님 정말 지난 3년의 활동을 마무리하는 과정이 될지는 나도 지금은 알 수 없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는 마음에,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다는 노랫말이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요즘. 도대체 어떤 생각과 감정들로 내 마음속이 요동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중반부터는 내 마음이, 그리고 하반기에는 몸 까지 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무언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은 것만 같은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고 덕분에 쉴틈 없이 달려오던 일상에 브레이크를 걸게 되었다. 이렇게 쉬기까지도 한 달 정도의 준비 시간이 있기는 했지만 지난 3년 동안 내가 활동을 해오던 에너지를 생각한다면 급브레이크 수준으로 내 활동에 제동을 걸게 된 셈이다. 활동을 기반으로 한 관계와 관련된 일상들이 내 삶의 90% 가까이를 차지해왔는데, 지난 월요일부터 갑자기 내 일상을 채우는 공기가 달라졌다. 글쎄 아직은 실감이 안 난다. 약간 긴 휴무일을 보내는 정도의 느낌이랄까. 그리고 사실 여행 준비를 이것저것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래도 오늘은 문득 정신이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내 일상이 조용했더라면 엄청난 잡생각들로 괴로워졌을 것이 분명할 테니 말이다. 생각할 틈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3. 우연히 만난 친구와 긴 수다를 나누다 오랜만에 마음속에 하고 싶은 것들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또 서로가 즐겁고 행복하게 일상을 꾸려갈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제안하면서 맑은 기운들이 조금씩 내 몸을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만사가  버겁고 귀찮고 힘겨워 이제 더 이상은 못하겠다며 두 손 두발을 들고 사무실을 떠난 지 일주일 만에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게 되다니 너무나 감사했다. 난 세 달이 조금 넘는 휴가가 지나도 내 기력이 그대로일까 너무 두려웠으니 말이다. 그 반가운 기운이 잊힐세라 집에 오자마자 네 장이 넘는 일기를 쓰며 생각했다. 아, 글을 써야겠구나.


4. 내가 이렇게 힘들어지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제일은 아마 내가 가진 언어가 너무 빈곤한 탓일 테다. 막막하고 불편하고 불안하고 분노가 일고 슬프고 또 어떨 때는 감격스럽고 위로가 되는, 활동 안에서의 내 생각과 감정들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너무 부족했다. 채 내뱉어지지 못한 그 수많은 말들이 내 마음에 쌓이고 쌓여 결국은 탈이 나고야만 듯하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는 시간과 육체적 여유가 너무나 부족했다. 하루하루 많은 일정들을 쫓아다니기 바쁘고, 집에 와서는 탈진한 듯 쓰러지고야 마는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곱씹고 많은 사건 사고와 경험들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소화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긴 너무나 어려웠다. 앨리스 블로그에 나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블로그를 만드는 날부터 했었지만, 여태 한편의 글도 쓰지 못했다. 이 휴가의 기간 동안 여러 주제로 글을 쓰며 그간의 나의 복잡한 머리와 마음속을 정리해봐야겠다. 아마 이 과정이 나의 6월 이후의 일상의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작업이 되리라.


5. 마침 달력을 보니, 나의 휴가의 끝인 5월 31일까지 101번의 하루들이 있다. 하루에 한편씩 뭐라도 써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떠오른 이 작업의 타이틀은 (이중혁 작가의 책 제목을 따와서) "뭐라도 되겠지". 이 작업도, 그리고 101일 뒤의 나도, '뭐라도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남은 101일을 살아봐야겠다.


6. 작년에 꽂힌 파커 파머의 저서 중에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라는 책이 있다. 급제동으로 약간은 혼미한 나의 이러한 상황들이 분명 내게 걸어오는 말들이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 삶이 내게 걸고 있는 말들을 경청할 수 있는 마음과 귀를 가지도록 노력하고 싶다. 이 작업 또한 그 말들을 경청하기 위한 노력 중의 하나이다.


7. 내게 주어진 휴가 기간 동안 최대한 멀리 떠나고 싶었다. 내가 익숙했던 일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서 스페인행 티켓을 끊고서 늦게나마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다. 인터넷 강의도 보고 스터디 모임도 쫓아다니며 공부를 하다 보니, 이게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가 있다. 처음에는 스페인에서 생존하기 위해 최소한의 회화를 배우고 싶었던 건데, 내가 노력한 것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 낯설면서도 뿌듯했다. 아, 지난 몇 년간 나에게 이런 즐거움이 없었구나 싶었다. 활동을 하며 사람들과 부대끼고 이런저런 책들을 읽고 교육들을 듣는 일상들로 분명 나의 많은 부분이 변하기도 하고 내 안에 남게 된 것들도 많으리라 생각하지만. 그것들은 실체를 확인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오히려 내가 제대로 잘 하고 있는 것이 맞나 반추하면서 스스로를 자책하는 순간들이 더 많았어서 아프기도 많이 아팠던 것 같다. 그런데 스페인어는 웬걸. 내가 시간을 투자해서 공부를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말들이 늘어나고, 들리는 말도 늘어나고. 내가 이런 걸 좋아라 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살다 살다 처음 알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라는 말 따위... 눈으로 결과가 바로 확인되는 즐거움이 있다. 갑작스러운 휴가, 그리고 내가 그토록 애정 하던 활동을 이제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아프게 찌르는 순간이 여전히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스페인어 공부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듯) 이러한 것들을 계기로 나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기를 바란다. 


(Arco _ Lulla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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