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2 (수비리-팜플로냐) 어제 밤엔 다행히 잠을 푹 잤다. 자주 깨지 않았다. 일곱시 즈음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처음엔 방향을 찾지 못해 헤맸다. 내일은 사람들이 나갈 때 잘 따라나서야겠다. 헤매던 중에 다행히 어제 만났던 아저씨를 만나서 노란 화살표를 찾았고 무사히 출발할 수 있었다. 오늘은 걸으면서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늦게 출발한 탓인 것 같았다. 마지막에는 산 속에서 사람이 거의 없어서 살짝 무섭기까지 했다. 몇해 전에 누군가가 노란 화살표를 자기집 방향으로 그려놓고는 여자 순례자를 성폭행했다는 사건이 계속 생각났다. 아무도 없으니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도 혼란스럽고 그 길이 엄청 길고도 멀게 느껴졌다. (아마 혼자 걷는 삶도 마찬가지겠지) 혼자라 이런저런..
20170421 (론세스바예스-수비리) 어제 알베르게에서 한국인을 대여섯은 만났다. 그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길을 나섰다. 다행히 내 또래의 여자친구가 있어서 즐겁게 수다를 나누다가 삼십분도 안되서 걸음이 느린 나는 혼자가 되었다. 사람들의 속도를 따라가느라 풍경을 음미하지 못하는 것보단 내 리듬을 따라가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걸으면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대안학교 교사를 하고 있는 친구도 만나고 핀란드에서 온 친구도 만났다.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하다가 또 혼자가 되기도 하는 이 길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어떤 순간엔 좀 숨이 차고 풍경을 놓치더라도 이야기가 더 즐겁고 있기도 하고, 또 그러다 헤어져서 혼자가 되어 이것저것을 마음에 담을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한국에서의 나의..
20170420 (오리손-론세스바예스) 무사히 나머지 피레네 구간을 넘었다. 어제 8km를 다섯시간동안 걸었던터라 걱정을 했는데, 함께 걸은 한국인 덕분에 너무 쳐지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 스틱 길이도 새롭게 조정하고 가방 메는 법도 배우고 덕분에 좀 더 가볍게 걸을 수 있었다. 같은 무게라도 어떻게 메느냐에 따라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다르다는 게 새삼 새롭게 느껴진다. 그렇게 한참을 같이 걷는데 슬슬 대화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와서 한국 전형의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굳이 논쟁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도중에 나는 잠깐 쉬어가겠다고 하고 먼저 보내드렸다. 피레네 꼭대기에선 춥더니 슬슬 더워져서 옷도 벗고 물도 마셨다. 그렇게 조금 쉬다가 출발해서 내려가는데 그를 다시 만났다. 그런데 그..
작은 자유 (오지은) 너와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쓸데없는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네 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아름다운 것들을 같이 볼 수 있다면 좋겠네 작은 자유가 너의 손안에 있기를 작은 자유가 너와 나의 손안에 있기를 너의 미소를 오늘도 볼 수가 있다면. 내일도 모레도 계속 볼 수 있다면 좋겠네 니가 꿈을 계속 꾼다면 좋겠네. 황당한 꿈이라고 해도 꿀 수 있다면 좋겠네 너와 나는 얼굴을 모른다 하여도, 그래도 같이 달콤한 꿈을 꾼다면 좋겠네 지구라는 반짝이는 작은 별에서 아무도 죽임을 당하지 않길 지금 나는 먼 하늘아래 있지만 그래도 같은 하늘아래 니가 조금 더 행복하길 https://youtu.be/ZREcFeqMNQc
작은 씨 (시와) 어느 날 찾아온 작은 씨 가슴에 가만히 내려놓았지 혹시나 먼지가 아닐까 의심하던 나의 마음 무색하게 싹이 돋아 올랐네 한번도 본 적 없는 햇빛만 닿아도 얼마나 예쁜지 어느 날 찾아온 작은 씨 가슴에 가만히 내려놓았지 혹시나 먼지가 아닐까 의심하던 생각 무색하게 싹이 돋아 올랐네 한번도 본 적 없는 햇빛만 닿아도 얼마나 예쁜지 햇빛만 닿아도 얼마나 예쁜지 아무것 없어도 얼마나 빛나는 지 햇빛만 닿아도 얼마나 예쁜지 아무것 없어도 아주 튼튼하게 https://youtu.be/KCe-Ni6jCn0
https://youtu.be/yfHfXS1sYuY going home (김윤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는 햇살에 마음을 맡기고 나는 너의 일을 떠올리며 수많은 생각에 슬퍼진다 우리는 단지 내일의 일도 지금은 알 수가 없으니까 그저 너의 등을 감싸 안으며 다 잘될 거라고 말할 수밖에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것만 같아 초조해져 무거운 너의 어깨와 기나긴 하루 하루가 안타까워 내일은 정말 좋은 일이 너에게 생기면 좋겠어 너에겐 자격이 있으니까 이제 짐을 벗고 행복해지길 나는 간절하게 소원해 본다 이 세상은 너와 나에게도 잔인하고 두려운 곳이니까 언제라도 여기로 돌아와 집이 있잖아 내가 있잖아 내일은 정말 좋은 일이 우리를 기다려 주기를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기를 가장 간절하게 바라던 일이 이뤄지기를 난..
20170419 (생장-오리손) 산티아고길의 첫 코스는 피레네산맥을 넘는 것이다. 평소에 운동하고는 거리를 두고 살았던 나는 당연히 내가 하루만에 30km나 되는 피레네를 넘지 못할거라 장담했기 때문에 미리 피레네 중턱에 있는 오리손 산장에 예약을 했다. 그리고 지금 무사히 오리손 산장에 도착해 일기를 쓴다. 아침에 일어나 천천히 식사를 하고 산티아고로 캐리어를 부쳤다. 그리고 물과 초콜릿을 사서 걷기 시작했다. 가방은 7kg. 요령이 없어서인지 엄청 무겁게 느껴졌고 내가 무려 산티아고를 걷는다는 실감은 전혀 나지 않았다. 아홉시 반 쯤 출발했는데, 산티아고 순례에선 아주 늦은 출발 시간이라 그런지 걷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길을 물어볼 사람도 없어 조금 긴장하긴 했지만 이내 노란 화살표를 발견하고 안심..
20140423 (팜플로냐-사리키에기) 사람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깼더니 6시 50분이다. 어제 일찍 누웠는데도 그 시끄러운 와중에 깨지않고 잤다니, 엄청 피곤하긴 했나보다. 아님 내가 정말 예민하지 않거나. ㅋㅋ 씻고 짐을 싸고 있으니 어제 만났던 한국 분들이 잘 잤냐고 인사를 걸어오신다. 어제 밤에 내가 알베르게를 못 잡은 줄 알고 찾으러 돌아다니셨다고 하셨다. 그 말에 괜히 감사한 마음이... 아무튼 식사를 하고 그분들은 팜플로냐를 더 둘러본다 하셨고 나는 먼저 출발했다. 난 걸음이 느리니까... ㅋ 어제 마지막으로 노란 화살표를 보았던 곳으로 가서 걷기 시작했다. 한번 길을 헤매서 물어물어 다시 걸었다.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엄청 큰 고풍스러운 건물을 지나 화살표를 따라 걸은지 30분쯤 지났을까..
20170418 오늘의 긴 이동을 걱정한 탓일까. 지난 밤에 거의 30분마다 깨며 잠을 설쳤다. 잠도 안오는 김에 다섯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했다. 그리고 떼제-마콩-파리리옹-파리몽파르나스-바욘-생장! 이렇게 무려 다섯번을 갈아타서 무사히 생장에 도착했다. 어제밤에 잠을 제대로 못자서 엄청 피곤했는데도 이동하며 잘못할까 긴장을 했는지 잠을 또 한숨도 못잤다. 순례자 사무실에서 순례자여권을 받으니 저녁 8시. 순례자 사무실에서 만난 사람들과 같은 알베르게로 와서 쉬고 저녁도 함께 먹었다. 한 한국인 아저씨께서 돈 모아 시집가야지 이런데 혼자 오면 어떡하냐고 해서 그런 말 듣기 싫어서 왔다고 딱 잘라 답해드렸다. 그런 내 말도 대수롭지 않게 들으시는 것 같긴 했지만... 자려고 누워서 가만히 생각했다. 이렇게..
20170415 1. "네 마음에 불이 났다면 일단 그 불을 끄는 데 집중해봐. 누가 불을 냈는지 방화범을 잡으러 다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이미 집은 새까맣게 타버렸다는거지. 일단 네 마음의 불을 끄는 데 집중해라." -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p153, 조주은 몇해 전 마음에 불이 났던 어느날, 나에게 큰 위로가 되는 구절이었다. 그리고 지금, 작년에 크게 일었던 마음의 불이 어느정도 꺼졌으니 이제서야 방화범을 찾으러다니는 기분이다. 갑자기 생각나는 한 장면. 작년에 상담을 15회기 정도 받았었다. 어느날은 타인의 욕구나 반응에 민감한 나의 성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한참 얘기를 나누다 선생님께서 그런 말을 했었다. 폭력적인 상황에 자주 노출되었던 사람들 중 일부는 폭력적인 상황이 되풀이되는 것을..